1. 원래 강착원반은 어떤 모양일까?
영화 《인터스텔라》에 등장하는 블랙홀 가르강튀아를 보면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 블랙홀 주위에 밝은 원반이 있는데, 그 원반이 블랙홀의 위와 아래까지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실제로 원반이 그런 모양으로 휘어져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
블랙홀 주변에는 가스와 먼지 등이 모여 회전하는 강착원반(Accretion Disk) 이 형성될 수 있다. 강착원반은 기본적으로 도넛이 아니라, 가운데 구멍이 있는 납작한 원반에 가깝다. CD를 떠올리면 쉽다.
- 위에서 보면 가운데 구멍이 있는 동그란 원반이다.
- 비스듬히 보면 타원처럼 보인다.
- 정확히 옆에서 보면 아주 얇은 선처럼 보인다.
강착원반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중력에 의한 빛의 왜곡이 없다면, 옆에서 본 강착원반은 블랙홀의 좌우로 펼쳐진 납작한 띠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 블랙홀 주변에서는 그렇게 단순하게 보이지 않는다. 원반의 모양이 달라서가 아니라, 원반에서 나온 빛이 이동하는 경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2. 우리는 물체의 모양을 직접 보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먼저 생각해야 할 질문이 있다.
우리는 물체를 어떻게 보는 걸까?
어떤 물체가 보인다는 것은 그 물체에서 방출되거나 반사된 빛이 우리 눈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책상 위에 컵이 있다고 하자. 컵의 표면에서 반사된 빛이 눈까지 도착하기 때문에 우리는 컵을 볼 수 있다. 평범한 환경에서는 빛이 거의 직선으로 이동한다고 생각해도 충분하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빛이 들어온 방향에 물체가 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만약 빛이 중간에서 크게 휘어진다면 어떨까? 실제 물체가 있는 방향과, 우리가 그 물체를 바라보게 되는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물속에 꽂힌 빨대가 꺾여 보이는 현상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빨대 자체가 꺾인 것은 아니다. 물과 공기 사이에서 빛이 굴절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블랙홀에서도 비슷한 시각적 왜곡이 일어난다. 다만 원인은 물과 공기의 굴절률 차이가 아니라, 블랙홀 주변의 휘어진 시공간이다.
3. 블랙홀은 왜 빛을 휘게 만들까?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질량과 에너지는 시공간의 기하학적 구조를 변화시킨다.
그리고 빛은 그 시공간에서 가능한 경로를 따라 이동한다. 여기서 흔히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
빛이 휘어진다는 말은 빛이 갑자기 방향을 마음대로 바꾼다는 뜻이 아니다. 빛은 국소적으로는 여전히 빛의 속도로 이동하며, 휘어진 시공간의 경로를 따른다.
이를 물리학에서는 영측지선(Null Geodesic) 이라고 부른다.
조금 쉽게 비유해 보자.
지구 표면에서 적도를 따라 걷는 사람은 계속 직진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경로를 우주에서 바라보면 둥근 지구 표면을 따라 구부러져 있다. 빛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휘어진 시공간에서는 국소적으로 곧게 진행하는 경로가 멀리서 볼 때 곡선으로 나타날 수 있다.
물론 지구 표면은 2차원 공간의 비유이고, 실제 중력은 시간까지 포함한 4차원 시공간에서 기술한다는 차이가 있다. 블랙홀 근처에서는 이 효과가 극단적으로 강해진다.
빛이 블랙홀에서 충분히 멀리 지나가면 조금만 휘어질 수 있지만, 가까이 지나가면 크게 휘어질 수 있다. 심지어 특정 경로의 빛은 블랙홀 주위를 상당히 돌아서 관측자에게 도착하기도 한다.
이 현상을 중력렌즈(Gravitational Lensing) 라고 부른다.
4. 블랙홀 뒤쪽 원반을 볼 수 있는 이유
이제 강착원반으로 돌아와 보자.
우리가 블랙홀을 정면보다 약간 위에서 비스듬히 관찰한다고 가정하자. 강착원반은 평평하고, 블랙홀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이 원반을 관측자와의 위치 관계에 따라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앞쪽 원반: 블랙홀보다 관측자에게 가까운 부분
- 뒤쪽 원반: 블랙홀 너머에 있는 부분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앞쪽 원반은 쉽게 보인다. 그런데 뒤쪽 원반에서 나온 빛 중 일부는 블랙홀에 가려지거나 포획될 수 있다.
그렇다면 뒤쪽 원반은 완전히 보이지 않을까? 여기서 블랙홀의 중력렌즈 효과가 등장한다.
4-1. 뒤쪽 원반의 빛이 블랙홀 위를 지나온다
뒤쪽 원반에서 출발한 빛 중 일부는 블랙홀 위쪽을 지나며 크게 휘어진다. 그리고 그 빛이 관측자에게 도달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빛이 실제로 지나온 굽은 경로를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눈으로 들어온 방향을 기준으로 물체의 위치를 판단한다. 따라서 뒤쪽 원반의 일부가 마치 블랙홀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원반이 실제로 위쪽으로 솟아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평평한 원반의 뒤쪽에서 출발한 빛이 위를 돌아왔기 때문에, 그 부분의 영상이 위쪽에 나타나는 것이다.
4-2. 그런데 아래쪽에도 원반이 보이는 이유는?
빛이 블랙홀 위쪽을 돌아오는 경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뒤쪽 원반에서 나온 또 다른 빛은 블랙홀 아래쪽을 크게 돌아 관측자에게 도착할 수 있다.
이 경우 관측자는 빛이 아래쪽에서 들어온다고 인식한다. 그래서 원반의 일부가 블랙홀 아래쪽에도 나타난다.
즉, 블랙홀 위아래에 서로 다른 원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평평한 강착원반에서 나온 빛이 서로 다른 경로를 거쳐 도달하면서 여러 영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강착원반이 블랙홀을 감싸는 것처럼 보이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5. 하나의 물체가 여러 위치에 보일 수도 있을까?
가능하다고 하는데, 우리는 평소 하나의 물체를 하나의 위치에서 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빛이 여러 경로로 관측자에게 도착할 수 있다면, 하나의 물체에서 나온 빛이 하늘의 서로 다른 방향에서 관측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강착원반 뒤쪽의 작은 밝은 영역 하나를 생각해 보자. 그 영역에서 사방으로 방출된 수많은 광선 중 일부는 블랙홀 위를 지나 관측자에게 도달한다.
또 다른 광선은 블랙홀 아래를 크게 돌아서 도달할 수도 있다. 그리고 매우 특별한 경로를 따르는 광선은 블랙홀 주위를 한 번 이상 감돈 후 빠져나올 수도 있다.
그렇다면 관측자는 동일한 영역의 빛을 여러 방향에서 받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원반이 여러 겹으로 보이는 효과가 생긴다. 이러한 영상들을 중력렌즈에 의해 만들어진 다중 영상(Multiple Images) 이라고 한다. 다만 실제 블랙홀 영상에서 모든 경로가 똑같이 밝게 보이지는 않는다. 크게 돌아서 도달하는 고차 영상은 일반적으로 매우 얇고 희미하다.
6. 왜 뒤쪽 원반이 직선이 아니라 둥근 아치로 보일까?
빛이 위아래로 휘어지는 것은 이해했다.
그런데 왜 단순히 위아래에 선이 하나씩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블랙홀을 감싸는 둥근 아치가 만들어지는 걸까?
이것은 블랙홀 주위의 중력장이 공간적으로 어떻게 분포하는지와 관련이 있다. 회전하지 않는 이상적인 블랙홀은 구대칭적인 중력장을 가진다. 즉, 블랙홀 주변 어느 방향에서 접근하든 중심과의 거리 등에 따라 빛의 경로가 휘어진다.
뒤쪽 원반에서도 빛은 한 지점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원반의 왼쪽, 오른쪽, 가운데 등 여러 지점에서 방출된다.
그 빛들이 블랙홀 주변을 지나면서 서로 다른 정도로 휘어지고, 관측자의 하늘에 서로 다른 위치로 나타난다. 그 결과 뒤쪽 원반의 영상은 블랙홀 중심을 둘러싼 곡선 형태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블랙홀의 위쪽에 나타나는 아치는 블랙홀 뒤쪽 원반의 빛이 위를 돌아 도착하면서 만들어진다. 아래쪽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휘어진 영상이 생긴다. 이 때문에 평평한 원반을 옆에서 보고 있는데도 블랙홀 주변에 빛나는 고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여기서 구분할 점이 있다.
중력렌즈로 휘어진 강착원반의 영상 전체가 곧 광자 고리(Photon Ring)인 것은 아니다.
광자 고리는 블랙홀 주변을 여러 번 감돌다 빠져나오는 빛과 관련된, 훨씬 얇고 특수한 영상 구조다. 영화에서 크게 보이는 위아래의 밝은 아치는 주로 강착원반이 중력렌즈에 의해 왜곡된 모습으로 이해하면 된다.
7. 그러면 보는 위치에 따라 블랙홀의 모습도 달라질까?
실제 원반은 같은 자리에 있더라도 관측자의 위치에 따라 영상은 달라진다.
원반을 위에서 바라보는 경우
강착원반은 비교적 동그란 고리 모양으로 보인다. 관측 방향과 원반의 법선 방향이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원반을 비스듬히 바라보는 경우
강착원반이 타원처럼 보이면서 뒤쪽 부분의 영상이 중력렌즈 효과로 위쪽에 휘어져 나타날 수 있다.
원반을 거의 옆에서 바라보는 경우
원래라면 얇은 띠처럼 보일 원반에 위아래로 크게 휘어진 영상이 추가된다.
이때 인터스텔라에서 본 것처럼 블랙홀의 위아래를 감싸는 극적인 형태를 관찰하기 쉽다.
즉, 블랙홀 주변의 실제 구조만으로 관측 영상을 결정할 수는 없다. 관측자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빛이 어떤 경로로 도착하는지를 함께 계산해야 한다.
8. 인터스텔라는 이 모습을 어떻게 구현했을까?
인터스텔라 제작진은 블랙홀을 단순한 검은 구체와 빛나는 원반으로 그리지 않았다.
킵 손과 시각효과 제작진은 일반상대성이론을 바탕으로 빛의 경로를 계산하는 DNGR(Double Negative Gravitational Renderer) 를 개발했다.
일반적인 컴퓨터 그래픽스에서 사용하는 레이 트레이싱(Ray Tracing)을 생각해 보자.
보통은 카메라에서 광선을 역으로 추적해 어떤 물체와 만나는지 계산한다. 하지만 블랙홀 근처에서는 광선을 단순한 직선으로 취급할 수 없다. 블랙홀의 중력에 의해 휘어진 시공간에서 광선이 따라가는 경로를 계산해야 한다.
DNGR는 회전하는 블랙홀을 나타내는 Kerr 시공간을 바탕으로 광선 다발이 어떻게 전파되는지를 계산했다. 그 결과 원반 뒤쪽의 빛이 위아래로 나타나는 모습이나, 별빛이 여러 위치에 보이는 현상을 시각화할 수 있었다. 실제 영화에서는 관객이 이해하기 쉽도록 색상이나 밝기 효과 등에 일부 연출적 조정이 들어갔다. 그럼에도 가르강튀아의 독특한 형태는 실제 상대성이론의 중력렌즈 계산에 바탕을 두고 있다.